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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회사에서 퇴사 한 이후 3주 뒤, 다행이 새로운 직장에서 근무하게 되었다. 사실 조금 더 놀아볼까? 라는 건방진 생각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지만, 여튼 지금은 요즘 같은 시절에 일을 할 수 있다는 것 만으로 감사하면서 열심히(?) 근무중인 상태. 그럭저럭 오늘자로 벌써 4주라는 시간이 흘러버렸다. 그간 기획 관련 일을 맡아서 게임 내의 사소한 시스템들의 기획서 정리를 했고, 지난주 부터 게임에 들어가게 될 퀘스트 시스템의 디자인을 맡게 되었다. ‘일을 맡기고 전담시키겠다’는 기획 팀장의 말과 함께 부담 반, 의욕 반으로 일을 시작하고, 3일 정도 뒤 컨셉 안을 잡고 팀장에게 검토 상신을 했다. 초기의 기획안은 스포츠 온라인 게임이라는 장르 특성상 온라인 RPG 게임의 퀘스트 처럼 스토리텔링을 하는 것 보다는 XBOX360의 도전과제의 컨셉으로 가야 된다는 나름의 소신의 의견을 냈다.

사실 MO 형태의 스포츠 게임에서 퀘스트의 역할은 그 의미가 많이 축소 될 수 밖에 없다고 판단은 나름 근거에 기인한 것이었다. PvC 보다는 PvP가 주가 될 수 밖에 없는 온라인 스포츠 게임의 구조 상 퀘스트는 부차적이며, 단순히 게임을 하드하게 즐기는 플레이어들에게 하나의 과제를 만들어 그들의 게임 소비 시간을 늘리는데 의미가 있을 뿐이다(AI 패턴 제작 능력이 없는 회사의 기술력 부족도 큰 요인이 될 것이기도 했다). 때문에 모두가 즐길 수 있는 형태의 퀘스트가 아니라, XBOX360의 도전과제 시스템을 대안으로 들고 나왔던 것이었다.

초안의 검토를 마친 팀장은 몇가지 사항에 대해서 지적을 했다. 퀘스트를 습득하는 로직에 대한 설명 부족(XBOX 360의 경우에는 게임에 설정되어있는 도전 과제 전체를 한번에 불러오고 있으며. 때문에 문서에는 ‘게임 계정 생성과 동시에 목록을 자동 생성’이라고 단 한 줄을 적었다). 퀘스트의 종류가 세분화 되어있지 않음. 개인적으로 3대 악 퀘스트라고 생각하는 반복, 수집, 일일 퀘스트의 부재가 그 지적 사항이었다. 나는 이를 해당 부분에 대한 문서의 보강 지시라고 판단하고는 기존 문서에 각종 로직 세부 서술을 붙이고, 문서의 편집을 다시 한번 손 보고, 삽화와 순서도를 추가하는 고생을 해서 최종 문서를 제출했다(3대 악으로 여기는 퀘스트에 대해서는 고려조차 하지 않았다). 그리고 금일 검토 회의……

“음, 일단 퀘스트를 분류하고 리스팅 하는데 문제가 있어보이는데요?” 라는 팀장님의 질문에 리스팅은 각 레벨 등급에 나눠서 카테고리별로 한번에 내 놓는 것이 좋을 것 같다는 의견과 함께, 도전과제 형태의 진행에서는 이전 레벨에서 완료하지 못한 퀘스트도 수행 할 수 있도록 해야 되지 않느냐는 의견을 냈다. 거기에 팀장님이 응수한 대답에서 나는 말문이 막히고 말았다.

“그런 개념 보다는 퀘스트는 어차피 반복적으로 해야 되는거고 유저들은 보상이 없으면 퀘스트를 안해요. 때문에 분량과 구분이 중요한거고, 연퀘라던가 일일퀘같은게 들어가 줘야 유저들이 즐길텐데요. 레벨 등급이 아닌 레벨 단위로 세분화 시켜서 각각 리스팅에 나타날 목록을 설정해 줘야 할 것 같고 이에 대한 설정을 좀 더 자세하게 해 주세요”

처음에는 이게 무슨 소린가 했다. 여러가지 이유들을 바탕으로 기존 MMORPG에 있는 퀘스트를 피하고자 한다는 이야기를 분명히 문서에 적었고, 시스템 구조도 그런 식으로 서술해 둔 데다, 이미 해당 내용에 대한 초안의 검토까지 같이 마친 마당에 다시 이야기가 원점으로 돌아간 것. 갑작스러운 이야기라 당황스러웠지만, 그래도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건, 기존의 MMORPG 형태의 퀘스트 시스템으로 가자는 건가요? 우리 게임의 특성 상 그렇게 갈 필요가 있느냐는 생각입니다만?”

“꼭 RPG 게임의 퀘스트가 아니더라도 그렇게 가는게 맞는게 아닐까 싶어요. 거기에 덤으로 NPC를 대상으로 스토리를 얹는것도 어떨까 하는데요. 여튼 이 기획서에는 퀘스트 종류라던가, 진행 방법 등에 대한 세부적인 내용이 없네요. 업무 능력을 100이라고 가정했을 때 70 정도 밖에 보여주지 못한 것 같아서 좀 아쉽네요.”

아차 싶었다. 팀장은 문서의 내용을 자신이 원하는대로 해석을 해 버렸다. 이미 그의 머릿속에는 퀘스트 시스템에 대한 롤 모델(기존 MMO 게임들의 퀘스트 시스템의 전형, NPC에게 말을 걸어 이야기를 주고 받은 뒤, 죽어라 같은 패턴의 퀘스트를 단지 레벨 업을 위해서 진행하는 형태)이 있는 상태였다는 것을 그제서야 알아차린것이다. 기획서에는 분명 퀘스트 리스트를 자동으로 받고, 그것을 완료하는 조건과, 그에 따른 보상 방법에 대한 내용이 서술되어 있었다.

하지만 단순히 기존 MMO 게임들의 퀘스트 시스템을 살짝 비껴갔다는 것만으로 팀장의 머릿속에서 간단하게 무시되어 버렸다(졸지에 업무능력 마이너스라는 평가가 덤으로 붙었다). 거기에 대 놓고 기존 퀘스트 시스템의 단점 같은 것을 늘어 놓아봐야 소용없는 일이었다. 그저 ‘젠장, 언제는 맘대로 만들어보라며’라며 속으로 투덜거릴 수 밖에는 할 수 있는 일은 그닥 없어보였고. 결국 그렇게 회의가 끝내버렸다-문서에 대한 보강 지시(라고 하지만, 실상은 전면 재 작성이 필요한 상황)와 함께.

어차피 밑에서 일하는 사람의 입장에서는 윗 사람의 의도를 파악하고 이를 따라주기 위해서 노력을 해야 되는 것이기 때문에 내용이 내가 원하는 방향으로 결정되지 않았다고 배알이 뒤틀리거나 할 것은 없다(다만, 나중의 그 결정에 대한 책임을 아랫사람에게 전가시키지 않는다는 전제가 붙는다. 나는 분명 기존 MMOG의 퀘스트 시스템이 우리 게임과 잘 어울릴 것이라 여전히 생각하지 않는다).

다만, 그것보다 가장 크게 실망한 부분은 커뮤니케이션 문제다. 우선 나로써는 팀장의 의도를 적절하게 파악하지 못했다는 게 가장 큰 문제였다. ‘알아서 맡아서 만들어보라’는 이야기를 과신하고, 순진하게 ‘남들과 다른 걸 만들 수 있다’고 생각하고는 이에 대한 이견이 없을 것이라는 생각을 해 버린 것도 문제였다.

팀장의 경우에도 (내 입장에서의 이야기이지만) 상황을 보면 업무 지시 능력이 그다지 좋은 편은 아니라고 생각 된다. 자신이 의도한 바를 명확하게 설명 할 수 있고, 이를 바탕으로 업무 지시를 내려야만 정확하고 간결한 업무 지시를 내리고 빠른 결과를 얻을 수 있다.

‘알아서 만들라’는 이야기를 내 뱉은 이상은 자신의 의도 보다는 아랫 사람의 의도를 파악하려고 했었던 것이 옳았다. 그게 아니라면 초기에 자신의 의도(기존 MMOG 형태의 퀘스트 시스템을 게임에 도입 할 것)를 확실하게 전달하고 업무를 진행시켰어야 했다.

검토 회의 이후, 오전 내 충격으로 인하여 아무 일도 못한…척을 하면서 시간을 죽이다가 결국 기획서를 완전히 뜯어고치는 일을 반나절 만에 끝내고 깔끔하게 퇴근을 해 버렸다. 다음번 상황에서도 얼마나 커뮤니케이션이 잘 이루어질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내 잘못을 다시 저지르지 않겠다는 다짐 정도는 해 줘야 할 것 같다. 뭐, 안되면 별 수 없지만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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