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nS 십자군 이야기(5) – 라이온하트(The Lionheart)

제 3차 십자군 – 살라딘 vs. 리처드 1세

역사 연표

  • 1187년 10월 2일: 살라딘에 의하여 예루살렘 함락. 이후 이 소식은 전 유럽에 퍼지게 된다.
  • 1188년: 로마 카톨릭 교황 그레고리오 8세의 성지 탈환 주창. 제 3차 십자군 결성.
  • 1188년 3월 27일: 프리드리히 1세가 이끄는 십자군 제 1진이 출발.
  • 1189년: 기 드 뤼지냥이 살라딘에게서 풀려나다.
  • 1190년 5월 18일: 프리드리히 1세의 독일 군이 이코니움을 점령.
  • 1190년 6월 10일: 프리드리히 1세. 살레프 강에서 익사.
  • 1190년 7월: 잉글랜드 왕국의 리처드 1세와 프랑스 왕국의 필리프 2세가 십자군 원정을 위하여 프랑스 마르세이유에서 만나다.
  • 1191년 5월: 필리프 2세 단독으로 아크레에 도착.
  • 1191년 6월 8일: 리처드 1세 아크레에 도착.
  • 1191년 7월 12일: 제 3차 십자군에 의하여 아크레 함락. 필리프 2세는 병을 빌미로 십자군을 이탈한다.
  • 1191년 9월 7일: 아수프 전투 발발. 리처드 1세의 승리.
  • 1192년 9월 2일: 살라딘과 리처드 1세간 휴전 협정 조인.
  • 1192년 12월: 리처드 1세, 오스트리아 공작 레오폴드 5세에게 사로잡히다.

역사적 배경

예루살렘이 살라딘에 의하여 함락됨으로써, 제 1차 십자군 이후 거의 1세기 가까이 로마 카톨릭 세력에 의해 점령되었던 예루살렘이 이슬람 측으로 다시 돌아오게 되었다. 이 소식이 서유럽에 전해지자, 파급은 어마어마했다. 로마 카톨릭 교황 그레고리오 8세는 성지 탈환을 목표로 내세운 십자군 파견을 호소하였고, 이 호소에 호응하여, 잉글랜드와 프랑스는 진행 중이던 영토 분쟁을 잠시 중단하고 십자군 파견을 위한 준비에 나설 정도였다.

후일 왕들의 십자군(Kings’ Crusade)라고 불리게 되는 제 3차 십자군은 이름 만큼이나 참가한 제후들의 면면은 대단했으며, 이후 수 많은 전설과 설화를 만들어내는 역할을 하였다. 잉글랜드 왕국의 왕이며, 로빈후드 설화로 유명한 사자심왕 리처드(Richard the Lionheart), 프랑스 왕국에 강력한 통치 기반을 확립한 것으로 평가 받는  존엄왕 필리프 2세(Philip II Augustus), 신성로마제국의 황제로 붉은 수염이라는 별칭을 가지고 있었던 프리드리히 1세(Frederich I Barbarossa)를 필두로 유럽 전역의 영주들과 기사들이 제 3차 십자군에 참전하게 된다.

엄청난 위용을 자랑하는 제 3차 십자군이었지만, 그 여정은 다른 십자군에 비하여 그다지 순탄하다고 할 수는 없었다. 십자군의 선봉에 섰던 프리드리히 1세는 10만에 이르는 대군을 이끌고 기세 좋게 아나톨리아 지역에 도달하여 당시 룸 술탄국의 수도였던 이코니움을 점령하는 데 성공하지만, 1190년 6월 10일, 아나톨리아의 남동쪽에 위치한 킬리키아의 살레프 강(Saleph river)에서 급작스럽게 사망한다. 사인은 익사였다.

뒤늦게 출발한 리처드와 필리프 2세는 여정의 중간까지는 같이 동행을 한다. 애초에 잉글랜드 왕국과 프랑스 왕국의 분쟁은 점차 그 골이 깊어가기만 했다. 엘레오노르의 결혼 지참금 문제(아키텐의 봉토)는 리처드와 필리프 2세의 통치에 들어서면서 우호적인 관계로 봉합되는 것으로 보였으나, 원정 중 발생한 대립으로 인하여 점차 서로 등을 돌리게 된다.

불안의 조짐이 보였던 제 3차 십자군은, 1191년 7월 12일 예루살렘과 다마스커스의 중간 지점에 있는 항구 도시인 아크레를 함락시킨다. 하지만 아크레 함락 직후 병을 핑계로 필리프 2세는 자신의 군사를 이끌고 프랑스로 돌아가 버렸고, 아크레 공성전 당시 혁혁한 공을 세웠던 오스트리아의 공작인 레오폴드 5세(Leopold V, Duke of Austria) 역시 리처드가 홀대(국왕인 자신의 깃발과 일개 공작인 레오폴드 5세의 깃발이 함께 나부끼는 것을 용납하지 못한다하여 레오폴드 5세의 군기를 진흙탕에 던져버렸다)하는 바람에 앙심을 품고 십자군에서 이탈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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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 지도에서 제 3차 십자군 주요 전적지/The Battle Grounds of the 3rd crusade 보기

상황은 리처드에게 불리하게 흘러가고 있었다. 십자군의 주력 대부분은 자신의 고국으로 돌아가 버렸고, 기 드 뤼지냥과 시빌라 같은 예루살렘의 망명 귀족들은 여전히 왕국의 계승권을 두고 지리한 정략 투쟁을 벌이고 있었다. 팔레스타인 지역에서의 살라딘의 위력이 급감하였다고 하지만 여전히 위협적이었고, 그는 여전히 시리아와 이집트의 위대한 통치자였다.

주요 인물들

프리드리히 1세(1122 ~ 1190)

신성로마제국은 제국(Empire)이라는 단어에 어울리지 않게 그 권력 기반이 항상 취약하였다. 황제는 사실상의 선출직이나 마찬가지였고, 지방 영주들의 충성이 없이는 자신의 목숨조차 부지하기 힘든 경우가 많았다. 거기에 더하여 로마 카톨릭 교황과의 서임권 투쟁 등으로 인한 불화는 중세 유럽의 정세를 불안하게 만드는 한 원인이었다.

프리드리히 1세 역시 이러한 중세의 정치 권력의 소용돌이에서 한치도 벗어날 수는 없었다. 황제의 권력을 강화하기 위하여 그는 여섯번의 이탈리아 원정을 감행하기도 하고, 자신의 구원 요청을 무시한 벨프 가의 하인리히를 토벌하기도 하였다. 이후 황제의 권력 기반을 강화하기 위하여 노력하던 중 제 3차 십자군에 참전하게 된다.

10만이라는 대군을 이끌고 아나톨리아에 당도한 그였지만, 예루살렘에 도달하기도 한참 전에 살레프 강에서 어이없는 죽음을 맞이하게 되어버린다(그가 빠져 죽은 강의 수심은 일반 성인의 허리도 잠기지 않는 정도의 높이였다고 한다). 그의 죽음 이후 신성로마제국군은 룸 술탄국 및 아이유브 왕조의 군사에 의하여 그대로 무너져버린다. 이후 일부 패잔병이 트리폴리 등에 도착하여 리처드와 필리프 2세가 이끄는 십자군에 참전을 한다.

특유의 붉은 수염(바르바로사-Barbarossa)이 특징이었던 그는 아서왕의 전설과 같은 수많은 전설을 남겼다. 제 2차 세계대전 당시 나치 독일의 소비에트 연방 침공 작전이었던 바르바로사 작전은 프리드리히 1세와 관련한 전설에 기반하였다고 알려져 있다.

리처드 1세(1157 ~ 1199)

잉글랜드 국왕인 헨리 2세와 어머니 엘레오노르 사이에 셋째 아들로 태어난 리처드 1세는 생애의 대부분을 전쟁터에서 보냈으며, 용맹을 떨친것으로 유명했다. 때문에 사자심왕(Lionheart)이라는 별명을 얻었으며 중세 기사의 전형적인 영웅으로 묘사되었다.

하지만 그는 부친과의 권력 투쟁에 나서면서, 프랑스 왕국 국왕인 필리프 2세와 결탁하기도 하였다. 왕위를 획득한 리처드는 곧바로 제 3차 십자군에 참가하기로 결정하고, 원정을 위한 가혹한 세금을 물려 백성들과 봉건 영주들에게 원성을 받았다. 하지만 십자군 원정에 필요한 군자금 모금이 여의치 않자 성, 영지, 관직 등을 매매하여 비용을 충당하기도 하였다.

십자군 원정에서 살라딘과 맞서 혁혁한 전과를 올리기도 하지만, 십자군 내의 불화와 잉글랜드 내에서의 위험 신호-섭정 중이었던 동생 존이 왕위를 찬탈하려 한다는 첩보 때문에 결국 살라딘과 평화 협정을 맺고 귀국을 서두르지만, 오스트리아 공작 레오폴드 5세에게 사로 잡히게 된다. 이후 신성로마제국의 황제인 하인리히 6세에게 막대한 석방금을 지불하고 풀려나지만 왕권을 회복한 지 1개월도 지나지 않아 프랑스 왕국으로 전쟁을 벌이기 위해 다시 잉글랜드를 떠난다. 이후 1199년  리모주 자작의 반란을 진압 하던 중, 초저녁에 아무런 무장도 없이 성벽 가까이를 거닐다가 성에서 날아온 화살에 목을 관통 당하는 중상을 입고 사망하게 된다.

셔우드 숲의 로빈후드 설화는 리처드가 하인리히 6세에게 당시 섭정이었던 존의 폭거에 항거한 로빈후드의 이야기를 다룬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사실 당시의 수 많은 도적의 창궐은 리처드의 전쟁 선호와 그에 따른 가혹한 세금 착취에 의한 것이라 한다.

필리프 2세(1165 ~ 1223)

프랑스 왕국의 국왕으로 능수능란한 외교술과 정략적이니 술수로 프랑스 왕국에 강력한 왕권을 확립한 인물. 때문에 존엄왕(Augustus)이라는 별칭이 붙었다. 그는 잉글랜드 왕국의 헨리 2세와 아들인 리처드의 대립을 종용하여 헨리 2세를 왕좌에서 끌어내리는데 성공하기도 하고, 이후 제 3차 십자군 참전 후, 리처드가 팔레스타인에서 시간을 허비하는 동안, 홀로 프랑스 왕국에 돌아와 대륙 내의 잉글랜드 왕국의 영토(아키텐 등)를 자신의 세력권 안에 넣기 위한 시도들을 벌인다. 이를 위하여 리처드의 동생인 존을 충동질 하여 왕위 찬탈을 노렸으나, 결국 실패하였다.

그는 프랑스 왕국의 영토를 늘리는 데 주력하였으며, 확장 된 영토 내에 자신의 행정관을 파견하여 중앙 집권식의 통치 체계를 확립하였다.

레오폴드 5세(1157 ~ 1194)

오스트리아의 귀족. 공작위를 가지고 있었다. 제 3차 십자군에 참전하여 아크레 공방전 당시 아크레 함락에 공을 세우지만, 리처드 1세에게 홀대 받은 이후 그에 대한 원한을 가지게 된다.

이후 리처드 1세가 육로를 통하여 잉글랜드로 귀환 할 때 그를 사로잡아 신성로마제국 황제인 하인리히 6세에게 팔아 넘겨버린다.

남은 것은 사자의 허무한 기백 뿐이었더라

십자군의 주요 군사력이 이탈한 상황에서도 리처드는 용맹하게 싸웠다. 살라딘의 대군에 맞서 몇몇 전투에서 승리를 이끌어내기도 하였다. 하지만 결국 예루살렘을 회복하는데는 실패하였다. 본국의 상황도 그리 좋진 않았다. 섭정 통치 중이었던 동생 존은 형의 왕위를 호시탐탐 노리고 있었고, 십자군 원정 중 틀어졌던 필리프 2세와의 관계 역시 지속적으로 악화되고 있었다. 결국 리처드는 살라딘과 1년여에 걸친 정전 협상 끝에 1192년 9월 2일 휴전 협정을 맺고 귀국을 서둘렀다.

귀국길에 오른 리처드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은 그가 모욕을 줬던 오스트리아 공작 레오폴드 5세였다. 그는 리처드를 사로잡아 신성로마제국 황제인 하인리히 6세에게 팔아 넘겨버렸고, 막대한 석방금을 받아 그를 풀어준다. 신성로마제국에서 풀려난 이후 잉글랜드에 도착한 리처드는 반란에 가담한 귀족들을 처벌하였지만, 주동자이자 동생인 존에 대해서는 용서와 함께 영지의 일부를 돌려주기도 하였다.

제 3차 십자군의 성과는 성지 회복이라는 목표와는 거리가 있었으나, 살라딘과 리처드의 휴전 협정으로 인하여 예루살렘에 대한 로마 카톨릭 신자들의 자유로운 왕례는 계속 유지 되었다. 또한 시리아의 지중해 연안 로마 카톨릭 국가들이 이후 약 1세기 동안 자신의 생명을 유지하는 데 도움을 주었다.

이슬람 세계의 위대한 영웅이었던 살라딘은 제 3차 십자군 원정이 종료 되고 1년 뒤인 1193년 3월 4일 다마스쿠스에서 사망한다. 이후 아이유브 왕조에서는 통치권을 둘러싼 싸움이 9년간 계속되고, 살라딘의 동생인 알 아딜이 최종 승리자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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