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으른 게임 디자이너의 반성

AnS의 전투 시스템을 뒤엎기로 결정한 이후, 변경된 전투 시스템에 대한 기능적인 구현이 이뤄지고 있는 동안, 게임 디자인 담당인 나는 변경된 전투 시스템에 맞춰 수정되어야 할 전략 시스템 부분에서의 게임 메커니즘을 손을 보고 있었다. 어느 정도 정리가 완료된 지금에서 하는 이야기이지만, 개인적으로 이 업무를 진행하면서 꽤 많은 스트레스에 시달렸다.

우리 프로젝트를 기대하는 많은 분들의 시선이 크라우드 펀딩 캠페인의 과도한 성공과 함께 부담으로 다가온 것도 사실이었다. 때문에 프로젝트 연기를 결정한 이후의 팀 분위기는 전반적으로 무거울 수 밖에 없었고, ‘무엇을 어떻게 수정할 것인가?’ 하는 문제에 대하여 대단히 예민해져 있는 상황이었다. 사실 그 상황을 더욱 악화시킨 것은 게임 디자이너 직함을 가지고 있는 나 자신이었다.

게임의 시스템(혹은 규칙이나 동작 방식)을 디자인하는데 있어서 ‘목적’은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예를 들어, 이 게임은 왕국과 종교 관계를 통하여 중세 시대의 종교 중심으로 흘렀던 권력 관계를 표현하고자 합니다-그렇기에 종교 관련한 기능이 들어가야 합니다. 하는 식이어야 한다. 하지만 전략 수정 작업을 진행하면서 각 세부 시스템의 기능 정리에만 신경을 쓴 나머지 그 ‘기능의 목적’을 상실했다.

여기에 더하여 나에게 관성적으로 기획을 하는 버릇이 나오고 있었다(전략 게임이라면 당연히 이런 기능이 있어야 되는거 아니겠어? 같은). 이전 버전 게임의 치명적인 약점 중 하나는 ‘각 기능들이 게임에 연계되지 않고 좀 따로 노는 기분이 든다’라는 것이었고, 이것은 사실 내가 기능 중심 게임 디자인을 한 결과였다.

개선 작업에 들어가면서 디자인 안을 던져주면 팀 동료이자 프로그래머인 아노아씨는 항상 이렇게 되묻곤 했다. ‘그래서 이 기능이 어떻게 게임에 작용하는건가요?’, ‘이런 기능이 있는건 알겠는데, 게임에 어떻게 영향을 미치는거죠?’, ‘기능의 사용 패턴은 게임의 초/중/후반에 어떻게 바뀌나요?’ 등의 질문에 나는 매끄럽게 답변을 하지 못할 때가 많았었고 때문에 스트레스는 더욱 가중되었다.

사실 매번 계속되는 회의와 기획안 재 검토를 하면서 내 스스로가 빨리 문제점을 파악했어야 했지만, 내 능력의 한계로 인하여 내가 기능 중심 게임 디자인이라는 나쁜 작업 습관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시간이 한참 흐른 뒤에나 자각 하게 되었다(내 능력의 한계에 대해서 자각 이후 멘탈 붕괴와 자기 비하는 덤). 이후에 게임 디자인 방법을 바꿔, 기능 서술보다는 게임 플레이의 진행의 목적, 동기, 흐름에 집중을 하고 거기에 필요한 기능의 정리와 게임 진행의 목표에 집중을 하기 시작했다. 게임의 기능들이 단순히 나열되지 않고 서로 유기적으로 흐를 수 있는 것에 초점을 맞추려 노력했다-하지만 여전히 잘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어제(2013. 3. 20.) 일부 번역되어 공개된 울티마의 아버지 리차드 게리엇(Richard Garriott)의 논란의 인터뷰(…) 내용에 내가 함부로  ‘우주 먹튀’ 같은 농담을 섞을 수 없었던 이유도 막 이러한 경험에서 벗어난지 얼마 되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그의 말을 들어보자.

내 평생 같이 일해본 디자이너들은 솔직히 모두 게으르다고 생각한다.

그 사람들은 보통 ‘메달 오브 아너 같은 건데 더 큰 무기 혹은 더 많은 헬스 팩이 있다’ 그렇게 말한다. 정말로 앉아서 ‘어떻게 정말로 차이를 만들까’ 생각하기보다는 자기가 좋아하는 게임에서 하나 둘 고치고만다.

그냥 지도 하나를 만드는 것조차도 나는 내 팀을 밀어붙인다. 어떻게 모든 것을 전체적으로 생각할 수 있을까? ‘그냥 돌아다니면서 뭐 몇 마리 죽이고 마지막에 보물을 얻는 거면 돼.’ 왜 되나? 그런 행위를 하는 동기가 뭔가? 그 옆에 이야기가 있나? 그 안의 캐릭터들이 있으면 그 전에는 어떤 삶을 살아왔는가? 이 중 하나도 생각 안 해봤으면 다시 돌아가야 한다. 다시 해야 한다.

– 게이머의 인용 (리차드 게리엇의 PC 게이머 인터뷰 중)

그가 지적하는 게으른 게임 디자이너가 바로 여기있었다. 솔직히 이야기 하자면, 내 결점을 완벽하게 보완했는지는 여전히 의문이다. 하지만, 그의 이야기를 보고 절절하게 공감과 동시에 반성을 한다. 더불어 유능하고 게임 제작에 열정적인 동료 덕분에 나의 잘못된 습관을 개선 할 기회를 얻었다는 것 만큼 기쁜 일도 있을까 싶다.

P.S. 그간 작업을 진행하면서 답답한 게임 디자이너와 일을 하느라 정신적/육체적으로 피곤했을 아노아씨에게 진심을 담아 감사의 인사를 드린다. (하지만 여전히 답답한건 함정…)